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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의 고백록, 침묵한 교회…가톨릭 성추행의 구조적 진실

yeosuo1 2025. 5. 4. 18:46

최근 남미 볼리비아에서 발생한 가톨릭 성직자의 아동 성학대 사건이 전 세계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단순한 개인의 일탈을 넘어, 수십 년간 지속된 성폭력과 이를 묵인·은폐한 교회 조직의 구조적 문제까지 드러나면서 가톨릭 교회는 또다시 심각한 신뢰 위기에 직면했다.

■ “85명의 피해자”... 죽기 전 남긴 고백록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예수회 소속 스페인 출신의 성직자 알폰소 페드라하스(Alfonso Pedrajas) 신부다. 그는 1970년대부터 볼리비아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기숙학교에서 봉직하며 수십 명의 아동에게 성적 학대를 저질렀다.

그의 범행은 사망 후 공개된 ‘고백록’이라는 일기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일기는 그의 가족에 의해 발견되어 언론에 전달됐으며, 그 안에는 “나 때문에 고통받은 아이들이 너무 많다. 85명쯤 되는 것 같다”는 자백이 담겨 있었다.

피해자들의 증언은 더욱 참혹하다. 페드라하스 신부가 속했던 학교에서 공부하던 사제 지망생 페드로 리마(Pedro Lima)는 “아이들이 지옥에서 살았다. 낮에는 성인, 밤에는 악마가 되는 신부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학대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2001년 당시 성범죄를 고발하려 했지만, 오히려 예수회에서 추방당하는 불이익을 당했다.

■ 교황청의 늦장 대응, 책임 회피 논란

언론 보도를 통해 사건이 알려지자, 가톨릭 예수회 볼리비아 관구는 뒤늦게 내부 조사에 착수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 사건을 “통탄스럽다”고 밝히고 특별조사관을 현지에 파견했으며, 볼리비아 정부의 수사에 전폭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반응은 엇갈린다. 일부 피해자와 시민단체는 “교회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묵인했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페드라하스 신부의 일기에 따르면, 그는 한 동료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앞으로 고해성사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는 조직 내 은폐 관행의 단면을 보여준다.

■ 분노한 시민들, 거리로 나서다

볼리비아 국민들의 반응은 거셌다. 라파스 등 주요 도시에서는 “성범죄 은폐를 중단하라”, “아이들을 지켜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든 시위가 잇따랐다. SNS에서도 “교회는 진실을 말하라”는 해시태그가 퍼졌고, 볼리비아 대통령 루이스 아르세는 교황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사건 조사 자료를 공유하라고 요청했다.

해외에서도 파장이 일었다. 유럽과 북미 주요 언론은 이번 사건을 집중 보도하며, 가톨릭 교회 내 성범죄 대응의 구조적 미흡함을 지적했다. 일부 신자들은 실망과 환멸로 교회를 떠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제라도 진실을 밝히고 개혁하자”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 가톨릭 내부에 뿌리 내린 구조적 문제

전문가들은 이 사건이 단지 한 명의 성직자 범죄가 아니라, 가톨릭 교회 구조 전반의 병폐를 드러낸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한다. 가장 큰 문제는 폐쇄적인 위계질서다. 가톨릭 조직은 강한 수직적 문화 속에서 성직자의 권위가 절대시되며, 하급 성직자나 일반 신자의 문제 제기는 억눌리기 쉽다.

둘째로 지적되는 것은 은폐 문화다. 사건이 발생해도 교회 내부에서만 처리하려는 태도가 팽배하며, 경찰이나 외부 기관에 통보하지 않는 관행이 문제를 키운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많은 경우, 성범죄를 저지른 성직자는 징계 대신 ‘전근’이라는 형식으로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다.

셋째, 피해자 보호 체계의 부재다. 내부 고발자들이 징계를 받거나 외면당하는 현실은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가 된다. 볼리비아의 리마 사례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마지막으로는 국제 교회 행정의 비일관성이다. 교황청은 2019년부터 성학대 관련 지침을 강화했지만, 각국 주교단의 자율에 의존한 결과 현장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 쇄신은 가능한가?

이번 사건은 가톨릭 교회가 과거의 과오를 단순히 사과만으로는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웠다. 피해자 보호와 정의 실현이 최우선이어야 하며, 성직자라 해도 법 앞에서는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은 교황청과 각국 교구가 “무관용 원칙(Zero Tolerance)”을 확립하고, 모든 성범죄 신고는 외부 기관과 협력해 철저히 조사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 늦기 전에 교회는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의 신뢰는 더 이상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https://www.yna.co.kr/view/AKR20230609006900087